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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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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8-06 23:17

연중 18주 금요일

2,151
김오석 라이문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4-25)

 

자기를 버림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결심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자기를 버리거나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상관이 없다. 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불편함이나 고통을 감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생생한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의 표현이다. 그런 맥락에서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고,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사관의 핵심이다. 목숨이 위협당하는 현실은 사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순교의 상황 외에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름은 불의한 권력에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목숨 걸고 저항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온당하다.

 

목숨은 사실 모든 것이다. 목숨을 잃은 뒤에 내가 소유하고 누리고 있던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기로 결단한 사람이 지니는 영성은 세상 모든 것에서 초탈한 내적 자유를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영원히 살아있게 된다는 의미다.

 

내적 자유는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마음의 정화영으로 가난해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놓아버림으로써의 초탈은 사랑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인데, 그 이유는 집착에서 자유로워지지 않고서 온전하고 무조적인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재물은 우리에게 쾌락과 안락과 즐거움을 보장한다. 재물 자체는 악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들에 필사적으로 집착하여 노예가 되기를 갈망하는데 문제가 있다. 삶을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 또한 문제가 아니나, 문제는 다른 이들의 요구가 있을 때조차 재물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우리의 무력한 이기심에 있다. 우리가 내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다른 이들의 요청에 관대하고 자발적으로 응답할 때 증명되기 때문이다.

 

나는 네가 필요해!’ ‘너 없인 살 수 없어라는 말을 대개 사랑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사랑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어서 생겨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참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상대에게 숨 쉴 자유와 그들 자신이 될 자유를 열어주는 관심이다. 상대에게 집착하고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시간에 대한 집착도 포기의 대상이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언제든지 환대한다. 나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할애한 시간들을 머뭇거림 없이 포기하며 자유롭고 초연할 수 있을까?

 

명예와 평판에 대한 집착도 경계의 대상이다. 다른 사람의 존경과 인정, 비난과 악평에 자유로울 수 있기는 참 어렵다. 예수님은 창녀와 죄인들과 어울리며 손가락질 받았고 먹보요 술꾼’(마태 111,19)이라며 욕먹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성공하려고 애를 썼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을 때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경험과 배움으로 쌓아온 자신의 생각이나 확신이 무너질 때 엄청난 당혹감을 겪으며, 자기 자신과 자기 생각을 동일시하면서 생각을 바꾸기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지난날 당연시되던 과학적 진리조차 숱하게 의문에 부쳐지고, 위대한 과학자들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 일들이 수두룩하다. 자기 생각과 확신에 대해서도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움에 열려있어야 한다. 절대적 확신에 사로잡히는 것 역시 또 다른 노예화의 모습일 뿐이다. 이런 생각과 확신에는 하느님에 관한 것도 포함된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부적절하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깨닫게 될 때 진정 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열린다.

 

초연함이란, 포기하도록 요구받은 것을 기꺼이 놓아버리는 것이다. 세상의 온갖 것에서 초연함은 결국 목숨마저 놓아버리는 것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참된 내적 자유다.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온전히 자유로웠다. 그 모든 집착과 자기 목숨에 대한 애착마저도 그분의 자유를 방해하지 못했다.

목숨에 집착하고 매달릴 때,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죽은 것이라는 예수님의 역설적 가르침을 기억하자. 기꺼이 죽으려는 순간 우리는 온전히 살게 되고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너나없이 죽음과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우리는 언젠가 닥쳐올 죽음을 외면하려 기를 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끌어안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참으로 자유로워질 것이다.

 

집착을 벗는 과정을 통해 매일 죽을 수 있다면 매일 새 생명으로 살아날 것이고 내적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8월의 추천도서, ‘오늘의 예수’ 161-169페이지 <놓아버리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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