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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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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의글

2015-08-06 00:00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8월 6일. 목)

2,157
김오석 라이문도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3)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9,6)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이다. 사실 거룩한 변모라기보다는 예수님의 인성 안에 감추어진 신성이 드러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 때 확인된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다시 확인되는 장면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 천상세계의 인물들인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의 천상적 위치를 잘 드러내는 신비로운 장면이다.

 

제자들은 거의 정신을 잃고 혼미하여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베드로의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살자는 말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다.’는 예수님을 향한 용비어천가로 들린다. 영광과 신비 안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표현이겠다.

 

신비가들이 좋아할만한 복음서의 장면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이런 영광과 신비로 충만한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고 싶어 한다.

 

이런 열망의 왜곡된 모습으로 신기한 현상에 목매는 신자들이 꽤 있다. 성모상이 눈물을 흘렸네, 감실 문에 예수님이 나타난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네, 촛불을 오래 켜고 기도했더니 초심지가 성모님의 모습으로 바뀌었네, 유명 강사를 모시고 성령대회를 했는데 하늘에 구름이 십자가 모습으로 나타났네 하면서 요상한 사진을 좋아하고 온 집안에 붙여놓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적 세계를 믿고,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는 것 자체가 신앙의 신비인 것처럼 신비는 신앙의 기초다. 따라서 신비로운 어떤 것을 찾고 머물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것을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신비적인 요소만을 찾고 그 안에 안주하면 현실은 무시되고 삶의 기력은 오히려 상실될 수 있다. 구체적 인간 역사 안에서 우리와 똑같이 한 인간으로서 숨 쉬고 사셨던 역사적 인물인 나자렛 예수를 외면하고 그분의 신성만 얘기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을 내려오신다. 초막 셋을 지어 머물기를 원했던 베드로의 정신없는 말을 뒤로하고 현실 세계로 다시 되돌아 오시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신비는 신비에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하느님을 드러내는 내적 힘으로 변모할 때 참 의미가 있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관념이요 허구이다. 계속해서 신비로운 것만 추구하고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면 우리 신앙은 절음발이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만 중요시하고 신앙의 신비를 무시하면 그것은 종교윤리나 철학에 머물고 만다. 신비의 차원이 제거되어 버린 거기에는 하느님이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으로 강생하셨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신앙은 한낱 신화나 전설이 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정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 역시 신앙의 절음발이가 될 뿐이다.

 

신비로운 신앙과 현실적인 삶이 균형을 이루어야 성숙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다. 기도생활과 실천 행동이 통일성을 이루는 것이 천상과 지상의 조화로운 결합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균형 잡힌 신앙이 필요하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이며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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