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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5-06-28 20:19

연중 12주 토요일

2,414
김오석 라이문도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참 익숙한 청원이고 기도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성찬례 안에서 성체를 모시기 전에 완전함과 거리가 먼 나약하고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며 외치는 탄원이며 의탁의 기도다.

 

부족하고 약점 투성이인 자신을 자각한 사람만이 스스로 가슴을 두드리며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바칠 수 있는 감사와 찬미의 기도다. 자신이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 자본주의 현실 사회에서 재물의 능력에 맛을 들인 맘몬 숭배자들은 결코 할 수 없는 기도다.

 

인생사 모든 일을 완벽하게 준비해서 준비한 그대로 이루어내는 경우는 별로 없다. 혹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우연일 것이라고,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 자신이 철저하게 준비했고 완벽하게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기에 좋은 결과를 이루어 냈다고, 자신은 뭐든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자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완전함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정성을 다하고 최선의 땀방울을 흘리되 나머지는 그분의 은총에 맡길 수 있는 떠남과 초탈의 자세가 바로 믿는 이의 올바른 태도다.

 

인생에서 내가 계획하고 원하는 일이 온전히 내 뜻대로 이루어진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까? 실패를 거듭할수록 내맡기는 의탁과 무위의 겸손이 자라나 하느님의 뜻을 잘 살피고 온전히 그분의 뜻에 충실할 수 있는 신뢰의 사람으로 변모되는 것은 삶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다. 완벽하게 준비한 계획이 완벽한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하지 않음을 일찍 깨달은 사람이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과 뜻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예수님의 시선에서 볼 때, 백인대장은 얼마나 이쁘고 대견스러울까? 지배자로서 세상의 권력을 모두 움켜쥔 그가 자기 종의 치유를 위해 기꺼이 종의 신분을 자처하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당신 앞에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부를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눈여겨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위해 온 마음으로 헌신하던 제 종이 죽을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제가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던 충실한 종이었기에 그가 겪는 고통이 제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 꽂힙니다. 이제 저는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의 관대함과 사랑을 청합니다. 감히 부족한 제 집에 오시기를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주인이 종을 위해 자신의 종을 살릴 수 있는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자발적 종이 되는 자기 비허와 겸손은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이끌어내는 힘의 원천이 된 것이죠.

 

나를 주인으로 모시며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나요?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진실한 사람이 있나요?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자존심을 우습게 생각하며 하찮은(?) 종을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나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재물이 풍족할수록, 많이 배워 아는 것이 많을수록, 나의 권한이 클수록 무릎을 꿇는 것은 어려워지고, 내 무릎이 뻗뻗해질수록 나를 위해 헌신했던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은 한층 강해지고 가까워지는 삶의 역설을 어찌해야 할까요?

 

종을 위해 떠돌이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은 당당한 백인대장의 믿음이 오늘 나에게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묵상했으면 한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하느님의 선함과 의로움을 이루려는 이를 위해 무릎을 꺽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탄원과 청원의 울음을 울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당장 그 분 앞에 엎드리기 위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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