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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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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5 19:24

사순 제3주일 청년 사순특강

1,310
오정석 라이문도

+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저번 특강이 너무 길고 간격이 너무 넓어 읽기 힘들다는 의견이 있으셔서


조금 간격을 좁혀서 글을 게재합니다.


이번 주는 '정화, 조명, 일치' 중에서 '정화'단계에 대해 간략하게 써보았습니다.


되도록 어려운 신학적 용어는 피하고 이론적인 부분도 줄여서


부드럽게 표현해보려 했는데, 원래 의미를 제가 놓치고 지나가진 않았는지 우려도 됩니다...


벌써 세 번째 시간이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20315일 사순 제3주일

 

<강론 겸 사순시기 맞이 강의>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코로나-19의 기세도 조금씩 잦아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안심하기엔 이른 것 같고, 오히려 나라 밖에서의 코로나-19의 영향력은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더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다 건너 미국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고, 다른 여러 국가에서는 국경을 봉쇄하거나 입국자를 격리시키고 대규모 행사나 개인의 이동까지 금지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큰 산을 넘긴 우리나라의 방역 및 검사 체계를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적용하고 있고, 국내 기업이 개발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 키트를 각국에서 구입하길 희망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약간의 자부심도 들고, 걱정도 듭니다. 하루 빨리 이 난관을 온 인류가 힘을 합쳐 극복하길 기도합니다!

 

지난 시간에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사순 시기를 맞이한 지금 우리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사순 시기다운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들 저마다 세운 계획들을 잘 지키고 계신가요? ‘나의 약점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 약점을 대체할 수 있는 절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실천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지요? :)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계획이라 할지라도 내가 즐겨하던 행동들을 단박에 그만두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난 세월 적게는 2~30년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단숨에 그리고 아주 쉽게 생활을 바꿔보는게 쉽다면 그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실천 사항이 자기의 약점과는 다른 행동임에 틀림없습니다.

 

, 내가 의지를 갖고 이렇게 살아야 겠다고 마음먹고 절제를 실천하는 것과 내가 처한 환경과 상황의 변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게 된 것은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는 환경이 변화하면 금세 마음이 바뀌게 될 것이고, 내 삶에 큰 의미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좋은 절제를 실천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절제를 실천하며 들이는 노력과 그에 따른 결실의 보람 또한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고, 또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어렵지만 한 번 결심한 절제를 이번 사순 시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수난 없이는 부활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행복하게 절제하며 생활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당장의 절제가 나의 생활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나의 의미 있는 절제는 내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지금은 잠시 그렇게 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매주 주일에 성당에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고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현세에서의 행복뿐만 아니라 내세에서 받을 영원한 행복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한다면 남들이 하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 지켜야 할 때가 있고, 남들도 하는 것을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 사는 우리 신앙인들이 난처할 때가 종종 생기곤 합니다. 분명 누군가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우직하게 신앙의 법대로 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들은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하며 약간의 죄책감과, 또 약간의 변명을 남긴 채 세속의 격류에 자기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더욱이 먹고 사는 문제가 결부되거나 자녀의 문제나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가차 없이 세속적인 결정을 내리기 쉽습니다. 이 경우에는 대부분 죄책감도 많이 경감되는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혹시 저마다 마음속으로 어쩔 수 없었으니 하느님도 다 이해하시겠지...’라는 생각, 해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저는 많습니다......^^;)

 

첫 시간에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씀드렸죠? 그렇습니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도 없이 많은 죄를 저지릅니다. 개중에는 내가 분명히 인식하고 저지르는 죄도 있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저질러지는 죄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내가 습관적으로 저지르는 죄나 평소에는 저지르지 않을 법한 죄들을 실수로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 죄들 중에 어떤 죄가 죄질이 나쁜가를 탐구하려는 건 아닙니다. 단지 죄는 저지를 수 있다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뉘우쳐 회개하는 것’, ‘등 돌린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로 다시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와 회심의 과정을 정화(淨化)라고 말합니다.

 

정화는 말 그대로 깨끗이 함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깨끗이 할 대상은 나의 마음과 영혼이지요. 데이트를 하러 나갈 때에나 중요한 약속 장소에 가게 될 때, 우리는 몸을 깨끗이 씻고 용모도 단정히 해주고 정갈한 옷으로 차려입고 나갑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갈 때에 설레임도 있지만 약간의 긴장감도 가지며 집 밖에 나서게 되는데, 지금 나가는 나의 모습을 상대방이 어떻게 볼지 신경 쓰이는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정화, 특별히 사순절 동안 이루어지게 되는 정화 작업은 이렇게 약속에 나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깨끗이 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서기 전에 내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내 영혼을 정갈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해서 합당한 모습으로 예수님께 나 자신을 드러내고 그분을 내 안으로 맞아들이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나의 모습에 흠은 없는지, 정말 이대로 예수님을 뵈어도 괜찮을지라는 불안감이 함께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러한 불안감은 겸손함의 표현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불완전함에 의한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하느님 앞에서 깨끗해진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해야 합니다. 부활 체험! 저번 주에 말씀드렸었죠?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부활을 우리 자신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 모두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영혼을 정화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우리의 과업이 되겠습니다.

 

정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요? 교회 안에서 법적으로 이루어지는 정화는 매일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참회 예식(‘내 탓이오!’, ‘자비를 베푸소서’)과 미사 전후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를 통해 가능해집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화와 더불어 우리는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상등 통회(죄의 용서를 받으려는 참회자의 참회 동기가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에 있고 모든 것 위에 사랑해야 마땅한 하느님을 침해하였다는 사실을 두고 슬퍼하는 태도. '완전한 참회'라고도 한다)’라고 불리는 마음 속 깊은 뉘우침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고해성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지만, 단순히 그 용서 받음이 마음 속 깊은 뉘우침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똑같은 죄를 저지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 깊은 뉘우침의 상황과 계기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끄는 변화는 모두 같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진 사람은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이 발견됩니다. 어린이처럼 되라(마태 18,3)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함도 있겠지만, 영혼이 순수해진 사람들은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아직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영혼처럼 그들의 영혼도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삶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놀랍고 기쁜 일이며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영혼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며 살겠다고 다짐한 불초자식은 아직 영혼이 채 깨끗해지지 못하여 여러분께 내 영혼을 정화하는 법에 대해 감히 알려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하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항상 뉘우침보다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 있었고, 나의 보속보다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이 먼저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기워 갚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나의 모든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죄를 뉘우칠 수 있고, 영혼을 깨끗이 갈고 닦아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영혼을 정화시키고자 하는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학교에서 방학을 하고 한마음수련원 피정동에서 피정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친한 선배 신학생과 점심 산책 중에 십자가의 길을 걷다가 선배가 그런 말을 건넸습니다. “, 고통의 신비에서 반복되는 말이 뭐냐?” 설마 신학생이나 돼서 진짜로 궁금해서 질문하는 건가했지만 저는 담담하게 “‘우리를 위하여아니야?”라고 대답했죠. 그러더니 맞아, ‘우리를 위하여가 반복되잖아. 그런데 진짜 기도를 하게 될 때에는 우리를 위하여라고 안 느껴져.”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그러더니 선배 신학생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잖아. 근데 아닌 것 같아.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십자가를 지신 분이야. 기도를 하다보니 그렇게 받아들여지더라.” 저는 정말 망치를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우리가 한 형제, 자매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하지만 또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간혹 하느님께서 우리라는 단어 안에 용해되어 있는 나 자신을 위해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잊고 살곤 합니다. 그러나 항상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으시고 죽음을 맞이하셨던 이유는 바로 를 살리기 위하신 일이었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임을.

댓글목록

김동진 스테파노님의 댓글

김동진 스테파노 작성일

아멘~~
행복하게 절제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신일순 글로리아님의 댓글

신일순 글로리아 작성일

예비자교리 시작후~~  작년에
사순시기를  첨으로 보냈습니다
모르는게 너무많은데~~
올해두 성당을 가지 않구 있으니 더 모르는게  많네요
신부님을 글 읽으면서두 안개속에 있는듯 하지만~~
열심히 읽고 있어요~~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