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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엽동성당

말씀과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사제의글

2016-02-09 01:01

연중 5주 화요일

3,431
김오석 라이문도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마르 6,11)

 


9일기도를 하다가 하루를 빠뜨렸는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가? 1150분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12시가 넘어 끝나면 오늘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다음날 한 것인가? 미사 참석할 때 좀 늦었는데 성체를 모시려면 복음 봉독 전에 입장해야만 하는가? 주일미사 빠져서 주님의 기도 서른세 번 했는데 고백성사를 봐야만 하는가? 전대사란 무엇이며 다른 사람에게 이양할 수 있는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신자들이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궁금해 하는 질문들이다. 이런 지엽적인 질문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울적해지면서 머리가 헷갈린다. 질문의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목자로서의 자책감 때문이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떠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은 사랑의 근원에서 떠나 있다는 뜻이다.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느님의 유일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규정이나 전통은 모두 이 계명에 포괄되고 종속된다. 그런데 사랑보다는 규칙이나 규정을 잘 지키지 않았다고 사람을 무시하고 단죄하고, 조금 실수했다고 무안 주고 야단친다. 미사 중에 성가가 좀 틀렸다고, 전례 해설자가 실수하여 전례가 좀 뒤바뀌었다고 역정을 낸다.

 


교회는 군대도 아니고, 돈 버는 기업도 아니고, 세계챔피언을 길러내는 국가대표 훈련장도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이 드러나는 곳이고 실천되는 곳이고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기쁨이 넘실대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고린 13,7)

 


본질을 제쳐두고 비본질적이고 곁가지에 불과한 것에 매달려 노심초사 울고 불고해서는 곤란하다.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인 것은 복음을 받아들여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복음을 생활화하는 것 외에 없다. 그럼에도 성서를 읽거나 쓰거나 공부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열성을 내지 않는다면 언제나 그렇게 비본질적인 지엽적 문제에 매달려 허둥댈 수밖에 없다.

 


허둥댈 뿐 아니라 악용할 가능성도 많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는 코르반이라 하고 부모님께 해야 할 공양을 하지 않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뻔뻔함을 지적하신다. 코르반이란 하느님께 바쳐진 것은 세상 사람이 사용할 수 없는 서원 양식을 말한다. 자기 재산은 코르반했기 때문에 부모님을 자기 재산으로 모실 수 없다고 한다면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게 그저 기도 열심히 하세요.’라고 영혼 없는 말로 위로하는 것은 코르반과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준거는 사랑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보이는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멀리서 찾을 일이 아니다. 나와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사람 중에 가장 힘겹고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지, 가장 소외되고 기죽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보고 다가가 다정한 말 한마디와 미소를 건네며 이야기 나누고 시간을 내어주는 일이 사랑이다.

 


이기심의 그늘에서 빠져나오는 노력의 표현으로 작은 애덕이라도 꾸준히 실천하는 것,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것, 혹시라도 호들갑스럽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아껴두었던 감탄사를 더 자주 연발하는 새해가 되도록 해야겠다.”(이해인 수녀님 말씀: 서울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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